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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불이 켜질 때까지 일산을 걸었던 날 정발산역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는 아직 햇빛이 남아 있었다. 라페스타에서 필요한 물건 하나만 사고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쇼핑이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남은 시간은 호수공원에서 보내기로 하고 상가 사이의 넓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건물 사이로 먼저 보인 나무라페스타를 벗어날수록 음악 소리는 작아지고 나무가 많아졌다.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자 공원 입구가 보였고, 산책을 마친 사람들과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엇갈렸다. 호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가 사이의 공기보다 훨씬 시원했다. 우리는 분수 근처보다 사람이 적은 바깥 산책로를 택했다. 수면에는 아직 하늘빛이 남아 있었고, 멀리 있는 아파트 창문이 하나씩 밝아졌다. 친구는 걸음 수를 채우겠다며 속도를 높였다가 금세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낙지..
문래의 철공소 골목에서 발견한 서로 다른 시간 영등포에서 볼일을 마치고 곧바로 집에 가려다 문래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구름이 낮게 깔려 사진을 찍기 좋은 부드러운 빛이 남아 있었고, 함께 있던 친구도 오래 걷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했다. 큰길에서는 평범한 평일 오후였지만 골목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금속을 자르는 소리가 또렷해졌다. 낡은 철문과 새 작업실 사이철공소 앞에는 자재가 반듯하게 쌓여 있었고, 오래된 기계에서는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맞은편에는 통유리로 된 작업실과 작은 전시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낡은 것을 지우고 새것이 들어선 모습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이 같은 골목을 나눠 쓰는 것처럼 보였다.구름 낀 오후 문래의 철공소와 작업실이 이어진 산업 골목 작업을 방해하지 않도록 문 안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 골목의 질감과 빛..
늦은 저녁을 먹고 신림에서 도림천까지 평일 약속은 퇴근 시간이 조금만 어긋나도 늦어지기 쉽다. 이날도 친구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해 신림역에서 만난 시간이 여덟 시를 넘겼다. 긴 코스를 걷기보다 밥부터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도림천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제육볶음 냄새가 가득했던 식탁배가 고픈 상태라 메뉴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매콤한 제육볶음과 계란찜을 주문하자 뜨거운 철판과 뚝배기가 거의 동시에 나왔다. 양파가 익으며 단맛이 났고, 매운맛이 올라올 때마다 부드러운 계란찜을 한 숟갈씩 먹었다. 친구는 식사 중에 오늘 있었던 일을 빠르게 쏟아냈다. 나는 밥을 먹느라 대답을 길게 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편이 좋았는지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계산을 마쳤을 때는 가게 안 손님이 처음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상가 골목에서 물가로신림역 주변의 밝..
수원역에서 행궁동까지 버스 창밖을 따라간 오후 수원역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는 오후 햇빛이 아직 강했다. 행궁동까지 바로 택시를 타기보다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동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창밖 풍경을 천천히 볼 수 있고, 내려서 골목을 걷기에도 부담이 적을 것 같았다.버스가 시장과 주택가를 지나는 동안 높은 건물은 줄고 낮은 지붕이 많아졌다. 창문 가까이 보이는 성곽을 발견한 친구가 먼저 하차 버튼을 눌렀다. 공방 문이 열리는 시간행궁동 공방거리에는 금속 장식, 도자기, 종이 소품을 다루는 작은 작업실이 이어졌다. 문을 활짝 열어 둔 곳에서는 작업대와 도구가 그대로 보였고, 골목 한쪽에는 자전거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관광객이 빠르게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 동안 우리는 쇼윈도 안의 손잡이나 오래된 창틀을 천천히 구경했다. 성곽 쪽으로 더 올..
소나기가 그친 뒤 부천의 오래된 상가길을 걷다 부천역에 내리기 직전까지 창문에 빗방울이 붙어 있었다. 우산을 펼쳐야 하나 고민했지만 출구로 나왔을 때는 소나기가 거의 그쳐 있었다. 젖은 보도블록에서 흙냄새가 올라왔고, 가게 불빛이 물웅덩이에 길게 비쳤다. 비가 다시 올 수 있어 멀리 가지 않고 역 주변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비에 젖은 골목이 보여 준 색번화한 출구를 벗어나자 오래된 문구점과 동네 빵집, 수선집이 차례로 나타났다. 간판은 새것이 아니었지만 빗물 덕분에 색이 선명해 보였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피하며 걷다 보니 평소라면 지나쳤을 가게 안쪽까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역곡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 걷다가 빗줄기가 다시 굵어져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접는 사람들 때문에 입구가 잠시 붐볐지만 안쪽 자리는 비교..
오래된 친구와 상동호수공원에서 보낸 저녁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상동역에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학생 때는 자주 만났지만 서로 사는 곳과 일하는 시간이 달라진 뒤로는 얼굴을 보는 일도 큰 일정이 됐다. 이날만큼은 다음 장소를 촘촘하게 정하지 않고, 밥을 먹은 뒤 날씨가 괜찮으면 공원을 걷기로 했다. 해가 내려앉은 호숫가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상동호수공원으로 향했다. 낮의 더위가 남아 있었지만 나무 그늘 아래는 제법 선선했다. 산책로에는 운동하는 사람과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주민들이 끊이지 않았고, 호수 건너 아파트 창문에는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구가 도착한 뒤에도 바로 식당으로 가지 않고 공원 가장자리를 반 바퀴 걸었다. 예전에 함께 다니던 학교 앞 가게 이야기부터 최근 배우기 시작한 취미까지 주제가 자주 바뀌었다. 오랜만의..
부산역을 출발해 영도의 바다를 바라본 오후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곧장 유명한 장소부터 찾아가기보다 버스를 타고 영도로 건너가 보기로 했다. 창가에 앉으니 항구의 크레인과 창고, 산비탈의 집들이 짧은 장면처럼 이어졌다. 같은 바다를 두고도 길 하나를 돌 때마다 풍경의 높이와 색이 달라졌다. 경사진 골목 끝에서 열린 항구버스에서 내려 흰여울길 방향으로 걷자 평평한 길보다 계단이 더 자주 나타났다. 낮은 담장 너머로 빨래가 흔들렸고, 골목 사이로는 파란 지붕과 항구가 번갈아 보였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바다 냄새가 골목 안쪽까지 밀려왔다. 전망이 트인 곳에서는 서둘러 사진을 찍지 않고 잠시 난간에 기대 있었다. 배가 천천히 방향을 바꾸는 동안 크레인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관광지의 화..
해 질 무렵 동탄호수공원을 한 바퀴 걷다 오후 내내 실내에 있었더니 퇴근할 무렵에는 바깥 공기가 유난히 그리웠다. 동탄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저녁을 먹고 호수공원이나 걷자는 답이 왔다. 목적지를 여러 군데 정하지 않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다리가 아프면 쉬기로 했다. 약속이 단순하니 준비할 것도 많지 않았다.반듯한 건물 사이에서 만난 저녁빛상가가 모인 구역을 빠져나오자 시야가 갑자기 넓어졌다. 유리 건물에 걸린 노을은 주황색과 분홍색 사이를 오갔고, 호수 쪽에서는 자전거 벨과 아이들 웃음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신도시라는 말에서 떠올렸던 단정한 풍경보다 생활감이 훨씬 많았다. 벤치에 잠시 앉아 물 위로 길게 늘어진 빛을 바라봤다. 조깅하는 사람, 유모차를 미는 가족, 이어폰을 낀 채 천천히 걷는 사람이 같은 길을 서로 다른 속도로 지..